1962년 늦 가을,

나는 서울 세종로 4거리에 자리한 5층 건물 동아일보사의 4층 남쪽 끝 방에서 레코드 (LP판) 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1963년 4월 개국을 앞둔 동아방송이 시험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테스트 에어에 쓰일 음악의 선곡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 대중음악이 담긴 200여 장의 LP 판과 300여 장의 각종 수입음반이 고작이였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시험방송용으로 쓰일 판을 골라 제목을 써서 배정을 하는 일 이었다.
한국대중음악, 한국가곡, 민요와 창, 외국대중음악, 민속음악, 고전음악에 이르기 까지 모든 카테고리를
대상으로 고루 섞었다.

“여기는 서울에서 방송해 드리는 동아방송의 시험방송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중파 1230 킬로 싸이클로 듣고 계십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수신카드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안내 어나운스먼트를 곁들였다.

당시 아나운서실의 조직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동아일보사 교환양 가운데서 비교적 음성이 예쁜
사람을 골라서 안내방송을 대신했다. 그러다가 직업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다듬어 진 안내 방송이 나갔다.
황우겸, 박종세 아나운서등...

그러는 동안 미국의 RCA Victor 레코드로부터 1,300여 장의 원반이 수입이 되었다.
500 여장의 보잘것 없는 음반만으로 시험방송 음악을 배정하던 나로서는 하늘의 용을 만난 기분으로 신바람이 났다. 우선 카테고리 별로 분류를 해 보았다.
파퓰러 음악과 클래시컬 음악으로 큰 분류를 하고는 파퓰러 음악은 라이트(Light Music)로 구분하여 ‘L-' 로 기호를 삼았다. 클래시컬 음악(Classical Music)은 'C-'로 각각 대별했다.

대중음악인 경우 남자 가수 (MALE)의 레코드는 ‘LM-'으로, 여자 가수 (FEMALE) 는 'LF-' 로 했다.
그룹 (GROUP)은 'LG-' 연주 곡 가운데서 악단 중심의 오케스트럴 뮤직은 'LO-" , 악기 중심의 인스트루멘털은 'LI-' 등으로 구분했다.

클래시컬인 경우는 관현악은 'CO-', 성악곡은 ‘CV-' 하는 식으로 분류를 했다.
이 분류법은 사서학에서 제대로 짜여진 것과는 달리 완전히 내가 창안한 졸작이였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동아방송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강제로 문을 닫던 1980년 12월 까지 17년 8개월 동안, 동아방송의 레코드 라이브러리의 모든 레코드는 이 분류식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큰 불편없이 썼다.

나는 동아방송의 개국 요원으로 특채가 되어 밤을 낮 삼아 온 열정을 다 쏟았다.
고려대학교 3학년때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복학한 뒤, 학업의 열정이 어정쩡한 채 졸업을 한 뒤,
대 동아일보사에 입사를 하고 동아방송의 음악 프러듀서로 자리를 하고 있었다.

1963년 당시만 해도 방송, 특히 라디오방송은 어나운서 중심 시스템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모든 프로그램은 어나운서의 배정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래서 스타 어나운서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강찬선, 장기범, 최계환, 임택근, 이광재, 전영우, 최세훈, 강영숙 등 그야말로 전파를 타고 하늘을 가르는
방송스타들이 기라성을 쌓았었다.

동아방송은 이런 어나운서 전성시대를 마감하는 도전적인 프러듀서 시스템의 선봉에서 본격적인 프러듀서 중심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방송에서 프러듀서 가 무얼 하는 직업인지 일반인들은 잘 몰라주던 때 였다. 심지어 방송국에 나간다고 하면 “아나운서냐?”는 질문이 자연스러웠다.

최창봉(당시 방송부장)을 주축으로 한 동아방송에서 시도된 프러듀서 시스템의 역할을 가히 혁신적 이였다.
특정 프로그램에 배정 어나운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프러듀서가 담당 어나운서의 교체를 요구했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외부 인사를 서슴없이 영입하여 진행을 맡기기도 했다.

뉴스는 어나운서가 원고를 낭독하는 것이 철칙이던 것이 동아방송에서 현장을 뛴 취재기자가 마이크 앞에
나섰고, 뉴스 데스크가 뉴스 쇼를 진행 하기도 했다. 이것이 한국 방송에서 첫 시도된 뉴스 앵커 였다.
동아방송은 바로 이른바 프러듀서 전성시대의 서막의 주역을 해 낸 것이었고, 나도 그 한 편에서 열성껏 일을 거들었다.

나는 개국 당시 매일 12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이제 까지 다른 방송에서 시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포맷의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그동안 KBS에서 일주일에 단 30분간 방송하던 (“금주의 히트 퍼레이드”)파퓰러 프로그램을, 매일
방송하는 파격 프로그램 “TOP TUNE SHOW" 를 기획 제작했다.

나는 이어 한국 미디어 (방송,신문 포함)에서 최초로 파퓰러 뮤직 주간 랭킹 프로그램을 개발 (“동아 베스트 텐”) 했다. 가요 프로그램도 맡고 있던 나는 곧 이어 한국 미디어(방송, 신문)에서 최초로 대중음악의 주간
랭킹 프로그램 “가요앙코르”도 개발했다. 그러니까 이 때 한국에서 팝과 가요의 차트를 처음으로 동시에
시도한 것이다.

1964년에는 “TOP TUNE SHOW"의 프러듀스에서 진행까지 도맡아 하는 디스크 자키를 개발했다.
이것이 한국 방송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 이었다.
프러듀서, 어나운서, 믹싱 엔지니어, 작가, 섭외, 자료 발굴에 이르기 까지 혼자서 해 내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서 원고를 따로 써 준 것을 들고 어나운서실로 들어가서 진행 어나운서를 배정받아 낭독하게 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디스크 자키 형식의 프로그램이란 말은 더러 쓰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로우 프로파일(Low-profile) DJ 라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인 것 이였다.

요즘 한국의 각종 방송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디스크 자키 프로그램들도 따지고 보면 초기의 이 로우 프로파일 디제이 의 수준으로 되돌아 갔거나 그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한국의 라디오에서 음악프로그램 구성이 40여년전의 스타일로 되돌아간 퇴조현상이란 말이 그래서 나오고 있다.

한국방송환경이 왜 절대 청취층과 등을 돌리고 있는가

1963년 4월 25일,

동아방송의 개국으로부터 꼭 42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아직도 방송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마치 하다 만 것 같은 아쉬움의 여운이 잔잔히 자신을 짓누르고 괴로워하는 것은 왜 일까.
절대 청취 대상 (오디언스)에게 줘야 할 제대로의 요건을 드리지 못한 빚을 잔뜩 진 그런 느낌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 역부족의 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직접적인 요인은 내 자신이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고 자책을
해 본다.

그러나 또 하나의 요인은 다분히 우리 방송환경에서 기인된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방송이 본래 가져야 하는 정도가 무엇이며, 방송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방송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인가 하는 한계를 스스로 다짐하면서 더러는 초조하게 또 어떤 때는 가벼운 탄식을 하면서 많은 날 들을 공들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방송환경은 좀처럼 발전의 기미를 쉽게 발견 할 수 가 없이 편협한 골목길로만 내 몰리는 느낌만이 커 갔다.
그것은 나라 안에서 함께 어울릴 때도 그랬지만, 한동안 나라 밖에서 보는 우리 방송환경은 더욱 큰 골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 이였다.

제대로 다듬어진 방송일꾼들을 멀리하고, 학교방송 수준의 치기 어린 사람들을 앞세우기를 더 즐겨하는 이상풍조가 언제부턴가 우리 방송가의 주류(?)를 이룬듯 한 묘한 인습이 만연되어 갔다.

큰 미디어(Main Station)나 작은 미디어(Minor Station) 할 것 없이, 너 나 모두가 이런 이상풍조의 유행속에 휘말린 듯 차츰 대중과 방송, 특히 라디오와 절대청취계층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함이 뚜렷하게 보인다.
심지어 스무 살만 되어도 라디오 방송을 듣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는 자탄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라디오가 기성 오디언스 들을 마다하고 편향된 청소년 전유물처럼 변질된 방송환경에 대하여 누구 하나 이를 나무라거나 바로 잡아 수정하려는 이 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침묵하는 절대 청취층인 오디언스들의 방관이 문제다.
둘째 방송 전문가들의 무기력해 진 품격잃은 소극적 대응이 문제다.
셋째 방송학을 전공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방송관련 교육기관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침묵하는 절대청취층
무기력해진 방송전문인
방송교육기관의 책임을 생각한다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라디오의 분야 가운데서 음악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오디오 브로드케스팅 미디어로 태어났다.
사실 방송의 첫째 요건은 오디언스 (청취, 시청 그리고 참여 계층)가 마음 편히 듣고 보는 즐거움을 주는데 있다.
특히 라디오인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음악이 그 중심적 기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방송환경은 어떤가.

방송에 걸맞지 않는 품격없이 함부로 하는 말이 오히려 정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오디언스가 마음 편하게 듣고 즐기는 음악은 외면한 채, 쓸데없는 말장난과 진행자나 출연자 중심의 편협한 화제를 주제로 삼는 것이 기본 포맷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것이야 말로 주객의 전도가 아닌가.
오디언스가 왜 그런 말장난과 자질구레한 몇몇 사람들의 사생활과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상의 감상문이나 넋두리를 전달받는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는가 말이다.

방송천국의 95%가 음악방송을 하는데...

텔레비전 방송국이 1,750여 국, 라디오 방송국이 1만 3천 5백여 개국을 보유하고 있는 방송천국 미국은 전
세계에서 방송이 가장 발달된 나라인 것은 잘 알려진 대로다.
세계에서 라디오방송을 가장 먼저 개발 시행했고, 가장 오랜 방송역사와 방송 오디언스 와 가장 친숙한 미국의 방송환경인 경우, 1만 3천 5백여 개국의 라디오 방송국의 95% 가 음악 전문방송 포맷으로 이루어 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랜 도록 방송의 노우하우를 아는 그들이 마땅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없어서
방송의 95% 가 음악방송을 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로 방송을 듣고자 하는 라디오 오디언스가 가장 원하는 포맷이 바로 마음 편하게 듣는 음악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에서 설정된 포맷의 정착인 것이다.
일본의 방송환경도 라디오가 차츰 음악 전문방송화로 전환되고 있는지 오래이다.
일본의 라디오인 경우 AM 이 74 스테이션, FM 이 47개국이 있다.
이들의 대부분의 포맷도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정보와 창조적인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음악이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방송이 우리나라와 방송 환경과 다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라디오가 ‘아이들의 장난감’은 결코 아니다.
우리처럼 방송을 듣고 보는 이 들을 바보로, 저능아로 대상을 삼지는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이 속된 말을 예삿말처럼 하고, 방송에 나와서 비정상적인 몸짓으로 사람들을 억지로 웃기려 하는 바보짓은 특수한 코미디물의 한 부분으로 족하다.
방송에 나와 몸짓을 하거나 말을 하는 사람보다, 이를 보고 듣는 오디언스들의 인격과 학식 또는 교양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면서 방송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사실을 엄격히 자성하는 이 들이 카메라나 마이크 앞에 나선다면 어찌 양심을 파는 편파 방송을
할 것이며, 어릿광대 같은, 말더듬이 같은, 변두리 술집 작부와의 잡담 같은, 니나노 상다리 두들기는 의성어를 어찌 감히 방송에서 서슴없이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라디오가 아이들의 장난감이라고?

나는 서울에 소재한 TBN 교통방송에서 지난 1년 6개월 동안 매일 자정부터 2시간 동안 심야방송을 생방송으로 진행했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4월 4일 새벽, 최동욱의 미드나잇 스페셜”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오디언스 에게 드린 바 있다.


.... 방송 46년에 이 처럼 여러 애청자의 뜨거운 정을 직접 확인하고 정을 나눈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 개인에 대한 우정과 방송을 통한 정을 나누었다 기 보다는 애청자 여러분이 얼마나 정서에 매 말라 하고 있나하는 현장의 확인 바로 그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일에 열중하지만 마음과 생각 같지 않게 세상은 각박하고 인정과 윤리가 매 말라 있는 이 땅에서 한 가닥 마음의 안위를 주는 것은, 내가 보다 젊고 보다 윤택한 마음과 보다 큰 꿈을 갖고 자랄 때, 또는 그
시절에 즐기며 좋아하던 추억담긴 노래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듣던 그 노래 그대로” 라는 말을 여러분께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내 마음을 편하고 포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친한 친구의 안위의 말 못지않게 나를
조용하게 감싸주는 정서어린 그런 노래들이였습니다.
이것들이 방송마다 외면당하고 있는 마당에 “미드나잇 스페셜‘이 여러분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 갈 수 있었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섭섭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인터넷이란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 이전 보다 더 많이, 이전 보다 더 좋은, 그리고 어디서나 듣지 못하던 주옥의 노래들을 언제나 듣고 싶은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도록 꾸며서 머지않아 여러분의 곁에 늘 함께하는 새로운 우정을 다질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전화위복이 아닙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새로운 시작이고 누구나 넘나보고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독보적인 으뜸 노래 스페이스가 꾸며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1963년, 어나운서 전성시대에서 프로듀서 시스템의 전환을 위한 헌신적인 작업에 동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어나운서 만이 마이크를 잡던 절대적인 아나운서 시스템 시대에 과감하게 도전해서 프로듀서, 어나운서, 믹싱 엔지니어, 작가의 분업적 역할을 혼자서 다 감당하는 디스크 자키를 개발했습니다.

모든 청취자가 라디오에서 버림받은 오늘의 한국 방송에서 이제 제대로 일할 때 가 되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한국 방송의 라디오가 왜 전체 청취자를 따돌리고 어린 청소년과 일부 연예인들의 말장난감 현장으로 변했을까요.
왜 한국 방송의 라디오가 음악성이 낮은 댄스 풍의 저돌적인
소비음악에만 열중하면서 공격적이고 폭력적 구성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기성 가요를 성인가요니, 전통가요니 심지어 트로트라는 가면을 씌운 채, 일본의 엥카를 그대로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일 까요.
심지어 일본 엥카에만 존재하는 노래음절 꼬리에 흔들고 신음하는 이른바 ‘우나리 부시’를 ‘꺾기’라는 엉뚱한 표현으로 엥카풍의 트로트를 가르치는 한심한 이들이 왜 버젓이 행세를 할까요.

저는 그 원천적인 요인들을 나름대로 분석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 가운데 하나는 기존 방송 미디어에 참여를 포기하는 대신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새롭고 도전적인 청취자 되불러 오기 운동에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방송의 첫째 요건은 듣고 보는 오디언스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하는 데 있습니다.
듣고 보는 이 들이 편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데 진행하는 이 들이 떠들고 낄낄 대는 것은 죽은 방송이고 방송이 아닌 소음이고 전파 낭비 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 방송의 라디오도 라디오 선진국들처럼, 퍼서낼리티 중심 시스템으로 차츰 변화해야 한다는 지론
입니다.

이른바 프러듀서 시스템에서 퍼서낼리티 중심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참다운 라디오 방송으로 발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진국들의 라디오 방송에는 프러듀서란 없습니다. 어나운서가 따로 없습니다. 믹싱 엔지니어가 따로 없습니다. 작가가 따로 없습니다. 리포터란 것도 없습니다. 모니터란 것도 없고 심의제도 같은 것도 물론 없습니다.
노동쟁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집약된 지식과 자질을 갖춘 퍼서낼리티 가 중심이 되어 그야말로 실력 있는 사람들의 피나는
경쟁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퍼서낼리티 한 사람이 너 댓 명, 또는 대여섯 명이 나눠 하고 있는 한국적 방송의 비능률적 분업 형태와는
확연하게 다른 일당백의 일을 다 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송사 측에서는 예산 절감에다가 높은 청취 신뢰도를 갖춘 좋은 퍼서낼리티를 다투어 초빙 계약하여 청취율 높이게 되니 이를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퍼서낼리티는 풍부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도의적이고 방송에 적합한 활동을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권위와 품위를 갖추고 청취자를 위한 진짜 좋은 방송을 한다면 오디언스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행복한 방송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방송이 진정으로 청취자를 되찾아 나서야 되고, 방송이 진정으로 시청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대중매체라고 자성을 한다면 최우선적인 과제는 방송 의 기본 구조부터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런 편제를 꾸미다 보니 불 필요한 인원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방송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활의 안정을 위한 직장의 개념만 강조하고 임금 투쟁을
다반사로 하는 까닭이 다 이런 요인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정작 방송에서 전문성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뒷전이고, 방송 행정과 관리 쪽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결과이겠습니까.

이런 것부터 속으로 크게 정체 되어 있는 방송 문화계가 큰 변혁과 개혁이 오지 않으면 우리방송은 더욱
더 대중들로 부터 외면을 당하는 소외된 미디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현재 절대 시,청취대중(오디언스)들이 방송 미디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방송 미디어들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되어 버리는 비극적 현상이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물어 보았습니까?
거리에서, 가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어떤 방송을 원하고 어떤 음악을 더 즐겨 듣고 있는 지 제대로 조사라도 해 보았나요.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인터넷 방송이 기존 미디어를 앞질러 대중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게서도 이제 본격 인터넷 방송이 생겨 날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되었고, 머지않아 능력과 실력으로 여러분에게 누가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경쟁의 시대에 과감하게 나서려 합니다.

여러분의 크신 격려와 성원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왜 ‘라디오 서울코리아’ 인가

나는 2001년부터 인터넷 방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방송에 필요한 자재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해서 2002년 초에는 개인 스튜디오를 완성하고 생방송으로 ‘세시의 다이얼’을 매일 오후 3시에 방송했다.

미국의 로스 앤젤러스에 있는 ‘라디오서울’을 키 스테이션으로 하여 와싱턴 D.C., 메릴랜드, 버지니어,
시카고, 샌 프랜시스코, 샌 디에이고, 라스 베이거스, 하와이 등지에 동시에 방송이 되었다.
미국판 ‘세시의 다이얼’을 청취하는 대부분의 애청자는 옛날 학창시절 또는 청소년 때 즐겨 듣던 동아방송의 ‘세시의 다이얼’을 다시 듣고 있노라면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시간이라며 매우 즐거워했다.
나로서는 매우 큰 보람 이였고, 감동 이였다.

2003년 가을부터 서울의 TBN 교통방송에서 심야 프로그램을 맡아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이에서도
서울에 옮겨 새롭게 마련한 홈 스튜디오에서 미국에 사는 동포들을 위한 방송을 매일 보냈다.
그러면서 숙원이던 인터넷을 통한 음악전문 라디오 방송을 꾸미려는 작업은 끊임없이 추진해 왔다.

‘라디오 서울코리아’의 도메인인 “www.radioseoulkorea.com"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계약했고, 동시에 “www.radioseoul-usa.com"은 3년 동안 계약을 했다.

나는 미국에 머물러 있던 동안 한국에서 인터넷 방송이 활성화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고국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서 멋있는 음악전문방송을 열어 드려야 되겠다는 여망을 조용히 추진해 왔다.
때 마침 우리나라에서도 중장년층을 비롯해서 실버 계층에 까지 인터넷의 필요성이 크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어떤 모임이던지 인터넷 교육이 빠져 있는 과정이 없을 정도로 이제 인터넷은 필수 생활교양 과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때다.
내가 인터넷 방송을 시작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결심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2005년 4월 15일을 계기로 방송을 시작하려 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4월의 시작은 불운을 가져올 확률이 많으니 “4월은 피하게나”하는 조언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2005년 5월 1일로 개국 날짜를 잡은 것이다.
5월 1일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에 모든 일을 시작하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은 아직은 집에서 이용해야 하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각 가정에 머물러 있는 기회가 가장
많은 일요일 오전에 조용히 시작하는 적절한 시점이란 생각은 그래서 택한 것이다.

라디오방송을 위한 방송기자재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마련이 되어 있었다.
최신형 디지털 믹서 콘솔 (Auditronics제 12페이더 30채널)을 중심으로 CD 플레어 4, MD 플레이어 2,
카셋 테이트 플레이어 2, CD 레코더 2, 노이만 마이크 등 4, 무선 마이크 1, 송출용 콤렉스, 에코 머신,
Roll 제 방송전용 튜너 2, Telos 전화혼용기 등에 이르기 까지 라디오 방송 시행에 아무런 불편이 없는 완전에 가까운 시설이 기본을 이루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프랑스제 방송 전용 제작 및 저장, 자동송출 소프트웨어 Dalet 5.1 까지 설치를 마쳤다.
그러나 인터넷 방송을 위한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과정을 거처야 하고 시간이 필요했다.
웹페이지 제작, 웹호스팅, 스트리밍 호스팅 업체 선정, 서버 시설과 관리와 접속 폭주에 대비한 증설 대비,
그리고 전용회선 설치 등 중첩의 가중이였다.

이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을 혼자서 다 해내야 하는 외로움과의 싸움이 뒤 따랐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시설비도 만만찮게 들어야 했다.
아무의 도움 없이 혼자서 저질러 마련하고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매달 1백만 원 가까이 드는 제작운영비도 들어가게 된다.
이 모든 시설과 소요 경비는 내가 단독으로 부담하고 있다.
아직은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 많은 돈을 들여 무모한 시도를 하는가?”고 염려를 해 준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분명하게 이런 대답을 한다.
“40 여 년 동안 보잘 것 없는 내 방송을 즐겨 들어 주신 분들에 대한 보답이다. 그리고 선한 마음을 갖고 정서 생활을 즐기시는 애청자들에게 좋은 벗이 되어 드리려는 개인적인 충정이고 내 팬들에 대한 은혜갚음이다.
그동안 내가 아끼고 어렵게 모은 귀중한 음반자료와 음악자료들은 기회 껏 애청자들에게 되돌려 전달하는
일을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책무로 다짐하면서 이 일을 시작한다.“ 고 ...

다행히 나는 술과 담배를 멀리 한지 25년이나 넘었다.
좋아하던 골프도 시간이 아까워서 못나간다.
배회하거나 소일할 만한 곳도 시간도 내게는 마땅한 기회가 없다.
하루 세끼 건강을 위한 소식으로 족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은 바로 인터넷 방송 에 소요되는 비용으로 대치한다는 생각으로 자위를 해 보기로 했다.
어리석은 짓인지 모르지만 여러 애청자 여러분께서는 이런 얼빠진 친구도 있구나 하고 관용을 주시기 바란다.
나는 한 때 내가 귀하게 모은 음반자료와 음악관련 도서들을 특정 미디어에 기증을 할 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자료라 하더라도 이것들을 제대로 활용하거나 응용하지 않고 닫아 둔다면 무용지물로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겠다는 겁이 났다.
그럴 바에야 내가 직접 이 자료들은 나를 아껴 주셨고, 음악을 가까이 하시는 선한 오디언스 들에게 직접
전달해 드리는 일이 오히려 현명한 되돌림이 되겠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 결론이 바로 인터넷 을 통한 닷캄 방송의 개설인 것이다.
앞으로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힘이 있고 능력이 다 할 때 까지 여러 선한 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제 나에게는 여러분과 함께 하는 완전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팬 여러분께서 마다하지 않는 한, 나는 항상 여러분 곁에 머물러 변함 없는우정 을 나누는 성실한 친구로
받아 주실 것을 기대한다.

닷캄 방송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바로 여러분의 새 친구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음악전문 방송이다.
18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제대로 정리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엄선된 노래들이 체계를 바탕으로 선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즐겨 듣던 정든 노래 추억의 노래 가 언제든지 흐를 것이다.
그동안 잊고 있던 그 때 듣던 그 노래들이 오리지널 버전 그대로 마련될 것이다.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파퓰러 명곡에서 클래시컬 음악에 이르기 까지
모든 카테고리를 다루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가꾸고 있는 어린 중학생으로 부터 은발이 성성한 실버 팬에 이르기 까지 고른 청취자 누구나 즐겨 듣고 좋아 하는 노래들을 가려 보내드릴 것이다.

꿈 많은 어린 중학생부터 실버 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제약 없이 좋아 하는 노래를 신청하고 바로 들을 수 있고, 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한곡씩이 아니라 좋은 곡의 선택이면 한 사람이 다섯 곡, 열곡을 신청해서 다 보내 드리려 마련할 것이다.

파퓰러 뮤직은 물론 클래시컬 명곡에 이르기까지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누구나 자유로 싸이트에 들어오고 누구나 아무런 부담 없이 Free 로 방송을 듣고
신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원에 가입을 하면 특수 음악감상회나 특수 행사에 초대를 받게 되고, 지역 선정 친목 야유회 등도
꾸미려 한다.
회원들이 원하는 더 멋진 행사와 사업도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누구나 FREE!

‘라디오 서울코리아’의 상징이 될 로고(LOGO)는 Radio Seoul 의 로마자 약칭 R S 와 태극을 조합한 것이다.‘
R’ 은 Radio를 뜻하고 ‘S’ 는 Seoul 의 이니셜이다.
왼편 붉은 부분은 ‘R'을 의미하고, 왼편 푸른 부분의 왼편 윤곽은 'S'를 뜻한다. 그리고 변형된 붉고 푸른
모양은 태극을 의미하는 Korea 를 상징한 것이다. 또 붉고 푸른 태극 사이에 물방처럼 보이는 흰 공간은
인터넷방송을 의미하는 'i'를 상징하도록 한 것이다.

인터넷 방송에서 인터넷 독자적인 방송을 하는 일을 흔히 ‘닷 캄 브로드캐스팅’(dot com broadcasting),
이를 우리표현으로 '닷 캄 방송’이란 말로 쓰고 있다.

닷 캄 방송 ‘라디오 서울코리아’ 로고의 뜻은 바로 한국의 얼

현대 통신의 발달은 끝이 없는 발전과 비약이 있는 가운데 방송에서 쓸 수 있는 통신 미디어도 날이 갈수록 발전과 변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기존 지상파 라디오와 TV 는 차츰 디지털 멀티미디어 브로드케스팅 (DMB)쪽으로 물고를 틀고 있지만 그
실용화와 보급에는 상당한 시간과 문제점이 많다.
거기에 비해서 인터넷 방송 특히 닷캄 방송은 가장 쉽고 정확하게 접속으로 이어지는 매력 있는 미디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 초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인터넷인 이른바 ‘와이브로’(Wireless Broadband Internet의 억지 약칭) 가 실용화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야말로 닷캄 방송은 어느 미디어 보다 강하고 친숙한 매체로 발전할 것이 확실하다.

내년부터는 휴대용 인터넷 방송시대

내년부터는 집에서 사무실에서 뿐 만 아니라, 차에서도, 걸어 다니면서도, 유원지 에서도 어디서나 인터넷
방송인 닷캄 방송‘라디오 서울코리아’를 즐길 수 가 있는 세상이 또 새롭게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잘 만들어 듣기 편하고 좋고 즐거운 방송으로 만들어 들려주고, 많이
듣게 되느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 미디어는 누구나 돈만 들이면 최신 기술로 최고가의 방송기재는 갖출 수 있겠지만, 문제는 방송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와 두뇌 그리고 노우하우의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닷캄 방송 ‘라디오 서울코리아’는 운영상 장애만 극복한다면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방송이
될 수 있도록 여러 애청자가 힘 있게 잡아 줄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천하의 애청자 여러분 이제 부터는 닷캄 방송‘라디오 서울코리아’와 함께하는 정서생활의 좋은 친구를 만들어 주시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2005년 5월 1일

닷 캄 방송 ‘라디오 서울코리아’를 열면서

최 동 욱 올림